나는 나일 것이 없다
깔끔하다. 처음 발을 디딘 작가의 작업실에 관한 소견이다.
깔끔하고 고요해서 지상의 다른 방 한 칸에 들어있는 듯하다.
육중한 오디오와 스피커가 그의 음악적 감성을 알게 하고
직렬로 벽에 걸린 작품들이 오랜 시간 작업에 천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크고 작은 사이즈의 그림들은 모두 한 가지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노랗고, 미지근하게 하얗고 새색시의 볼처럼 주홍빛으로 달짝지근하다.
작가는 “작업의 근원인 셈이다.”고 삼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
업실 앞, 무더기로 자란 파초 이파리가 푸른 하늘아래 선명한 초록으로 빛난다.
무등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고 깊다. 가을이 가고 있다.
「유년을 여여(如如)하다」
유년 시절 외가에서 보낸 시간들이 현재의 작가를 있게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유일하게 찾아간 시골이다.
이모할머니 댁이었다. 모든 환경이 신기했다.
늦은 밤이면 삼베를 짜는 베틀의 소리를 들었다.
딸각거리는 발소리. 실밥소리. 닥 실을 이리저리 꿰는 사그락 거리는 소리.
자려고 누운 작은 방에서 삼베 냄새는 언제나 그와 함께였다.
오방색으로 화려하던 이부자리와 베게, 방석 등도 기억 속에 선연하다.
작가는 “잠이 들 때까지 누런 삼베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보고 듣고 맡았던 냄새는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베는 우리의 옷감이다
목화로 만들어진 면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우리의 웃은 삼베였다.
씨실과 날실의 짜임이 성긴 옷은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겨울의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피부가 순한 아이들은 입을 수 없었고,
더 많이 두드리고 손질을 해야 입을 수 있는 옷이 되었다.
삼베는 쉽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삼베는 우리네 여인들에게 눈물과 한숨,
그 너머의 애환을 요구했다. 오랜 전통과 의복으로 치부할 수 없는
서러움과 그리움이었다.
이제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삼베는 우리 모두를 키워낸
어머니의 품 안 같은 그리운 존재가 되었다
「삼베는 그리움 그리고 한 사발의 정화수」
무엇을 그릴 것인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고래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정체성의 발현이자 결기다.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마주한 작가 역시 풀리지 않은 화두 중의 하나였다.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삼베는
어느 날 문득이 아닌 당연한 마티에르로 작가를 찾아왔다.
살아오는 동안 잊고 있었던 삼베의 냄새가 작가를 일깨웠다.
기억의 창고에 쌓여진 수많은 삼베의 소리와 냄새,
베틀과 유년의 평화로웠던 신비가 문을 열고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삼베가 작가에게 왔다. 이미 와 있었는데 깨닫지 못했다.
깨닫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대부분의 작업 안에
우리의 일상이었던 삼베가 작업의 일상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늠할 수 없는 집중을 요하며 화폭 안의 삼베를 직조한다.
실 한 오라기까지 놓치지 않는다. 삼베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 풍요로움,
그리고 삶의 근간인 따뜻함까지 한 올의 닥 실로 표현한다.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생각한다.
삼베는 단순한 옷감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 년을 걸려 닥나무를 가꾸고 삶고 두드려서 얻어낸 닥은
베틀에서 비로소 옷감으로 생산된다.
삼베의 냄새는 어쩌면 어머니의 냄새일 지도 모르겠다.
화폭에서 재구성된 삼베의 원형 속에서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모성을 읽고 느낀다.”며
“그런 의미에서 삼베는 그리움의 고향이며 새벽이면 자식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던 한사발의 첫물인 정화수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베 한 올에 어머니를, 또 한 올에는 유년의 어린 작가의 모습을 담는다.
외가의 모습도 담고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푸근하던 방 안 풍경도 담는다.
「본향(本鄕)이 내게로 왔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눈을 떠서 보이는 모든 것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들이 고맙고 아름답다.
돌아보면 지나 온 시간 곳곳에서 들렸던 불협화음이 어느 날부턴가 고요해졌다.
어쩌면 현재를 있게 할 우회적인 작업의 소재들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느낀다.
붓을 잡으면, 하얀 캔버스와 마주하면 마음은 더 적요해졌다.
작업은 더 깊어졌고 삼베는 빛깔과 모양이 더 다양해졌다.
삼베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더 다양하게 확장되었고 소재들도 늘었다.
현재와 유년의 기억들이 한데 묶어져서 발현되고 있음을 느낀다.
캔버스에 스크래치를 내어 삼베를 표현할 때 안정되며 고요해진다.
그동안 캔버스 위에 그 옛날 외가에서 보았던 삼베를 직조해낸 중량과 길이가
얼마만큼의 길이로 펼쳐질지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 삼
베의 한 올 한 올이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와
우리 모두의 생애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당가 봉숭아꽃이 만발한 장광의 항아리도 화폭 안으로 들어오고
늦은 가을날 길게 줄을 맞춰 날아가던 기러기도 들어왔다.
구상인 듯 비구상이고 비구상이면서 구상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난삽하지 않은 채 정돈된 오방색이
삼베와 어울리며 작가만의 정체성을 변주하는 중이다.
어린 시절 눈보라 속을 걷던 아이의 눈에 보였던
스산했던 겨울나무의 표정이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본향을 그리워하는 따뜻함으로
작업 안에서 빛을 발한다.
서양화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정서를 탐한다.
질료에서 얻어낼 수 있는 양질의 감성을 뽑아들고
한국화보다 더 한국적인 정서와 안정, 본향을 조형한다.
급작스런 산업화 과정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우리만의 정서가
작가의 화폭에서 살아나 숨을 쉬고 호흡한다.
사라져가는 도시의 달동네도 작업 안에서 빛을 발한다.
도시산업화 과정에서 아파트로 대변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며 사라졌던
갈등들이 따뜻한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질료인 삼베에 머물지 않고 삼베로 조형할 수 있는 이미지가 확장되고
강화 되면서 겨울의 헐벗은 나무들마저도 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따뜻하게 형상화 된다.
작가가 기억의 창고에서 찾아낸 함께 모여 살았던
유년으로의 회귀일 것이다.
멀리 왔다 여겼는데 사실은 제 자리 걸음이었다. 높
이, 멀리 뛰어 넘어 보고 느끼며 현재에 이르렀다 생각했는데
결국은 돌고 돌아서 본향을 찾아온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온전히 혼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삼베와 냄새
그리고 유년의 모든 것들이 가득 담겨져
삶이란 몸을 직립시키고 현재까지 오게 했다.
첫 마음, 심지를 잃지 않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
삼베라는 소재를 선택했을 때 이미 결정지어진 완성이다.
범현이
(전시비평·예술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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